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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민 페북, 광주 극동방송과 충장로에 걸린 현수막 근황 극동방송 김장환
    카테고리 없음 2019. 12. 29. 17:16

    박정희 정권이 위기를 겪고 있었고, 위기의 박정희 정권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런 행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7년 박근혜 탄핵을 앞두고 한국교회총연합회는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2017한국교회대각성 기도회’를 열어 난국에 빠진 우리나라와 교회를 구하기 위해 회개운동을 벌이자고 호소했다. 이에 앞서 열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교회연합이 서울 광화문



    특사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김활란 등 개신교계 인사들이 미국을 방문해 쿠데타 당위성을 밝히며 설득했다. 박정희 집권 시기에 빌리 그라함 목사의 민족 대복음화 집회가 여의도에서 열린다. 당시 김장환 목사가 통역했다. 김준곤 목사는 10월 유신 환영 메시지도 냈다. 보수 개신교세력들은 정교분리를 외치며 진보 개신교 세력의 활동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은 정권과 사실상의 뒷거래를 한





    개최했고, 기독교반공협회와 기독교반공교육협회 등 다양한 반공단체를 조직하는 등 반공여론 확산을 통해 박정희 정권에 힘을 실었다. 지난 1974년 7월 12일 청와대에서 박정희는 개신교 등 종교단체가 앞장서 만든 반공연맹 임원과 시도지부장 등과 만난 자리에서 6월 25일에 전국에서 반공대회를 연 것을 치하했다. 그러자 당시 반공연맹 임원을 맡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저희 교회에서도 그날 반공예배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했고, 박정희는 웃음을 보이면서 “종교 그 자체가 반공 그 자체가 아니겠느냐”며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올랐다. 100만 명이 넘는 개신교 신자들이 함께한 기도회에선 공산집단의 붉은 마수의 흉계를 경계하고, 정치인 근로자 학생 모두의 자성을 촉구하는 등 4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독재정권의 위기 때마다 열린 기도회 1975년 한경직 목사 설교 “나라 없이는 신앙도 자유도 재산도 모두 잃게 되므로 자유 민주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깨어나 함께 기도하자”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절이던 지난 1975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유신 독재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이 커졌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유신헌법 재신임 투표를 추진했다. 그해 4월9일 인혁당 재건위





    그 자체가 반공 그 자체가 아니겠느냐”며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바로 반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당시 언론이 보도하고 있다. 개신교의 반공주의가 박정희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장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는 “반공주의를 매개로 권력과 결탁한 개신교 세력들은 특혜를 누렸다. 박정희 정권이 친 개신교 정부라고 말하긴 어려워도 상당한 도움을 준 건 사실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반공주의를 내걸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좌익전력 때문에 미국은 의혹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사절단이란 이름의 특사로





    김일성 북한 괴뢰정권은 침략야욕을 버리고 정부의 통일 노력에 호응하라.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중지하고 우방으로서 신의를 지키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당시는 미군 철수 문제 등을 두고 논란이 이는 등 박정희 정권이 위기를 겪고 있었고, 위기의 박정희 정권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런 행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7년 박근혜 탄핵을 앞두고 한국교회총연합회는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2017한국교회대각성 기도회’를 열어 난국에 빠진 우리나라와 교회를 구하기 위해 회개운동을 벌이자고 호소했다. 이에 앞서 열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교회연합이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것”이라고까지 칭송했다.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발표한 다음 해인 1973년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서도 찬양 발언을 이어갔다. 김 목사는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 벌어지고 있는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 하겠다”며 “당초 정신혁명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는 이 운동은 … 맑스주의와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새로운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야 될 줄 안다. 외람되지만 각하의 치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군신자화운동이 종교계에서는 이미 세계적 자랑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만일 전민족신자화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만





    사형선고 20시간 만에 사형에 처하는 등 인권탄압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위기가 커지자 6월 22일 개신교 보수세력이 중심이 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40만 명이 모여 ‘나라를 위한 기독교 연합 기도회’를 열었다. 기도회는 4월부터 준비됐다. 각 교단들이 모임을 갖고 기독교범교단지도자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한경직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협의회는 “최근 인도차이나 사태에 따른 공산주의의 위협을 중시해 이에 대해 최대의 관심을 기울인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기도회를 추진했다. 22일





    결탁한 개신교 세력들은 특혜를 누렸다. 박정희 정권이 친 개신교 정부라고 말하긴 어려워도 상당한 도움을 준 건 사실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반공주의를 내걸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좌익전력 때문에 미국은 의혹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사절단이란 이름의 특사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김활란 등 개신교계 인사들이 미국을 방문해 쿠데타 당위성을 밝히며 설득했다. 박정희 집권 시기에 빌리 그라함 목사의 민족 대복음화 집회가 여의도에서 열린다. 당시 김장환 목사가 통역했다. 김준곤 목사는 10월 유신 환영 메시지도 냈다. 보수 개신교세력들은 정교분리를 외치며





    임원을 맡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저희 교회에서도 그날 반공예배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했고, 박정희는 웃음을 보이면서 “종교 그 자체가 반공 그 자체가 아니겠느냐”며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바로 반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당시 언론이 보도하고 있다. 개신교의 반공주의가 박정희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장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는 “반공주의를 매개로 권력과 결탁한 개신교 세력들은 특혜를 누렸다. 박정희 정권이 친 개신교 정부라고 말하긴 어려워도 상당한 도움을 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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